한국 전쟁 후 우리는 너무도 가난했다. 자본, 기술 그리고 변변한 지하자원 하나 없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에 허덕이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도착한 낯선 땅 독일, 약간의 설렘과 긴장 속에 지하 막장의 광부로, 병원의 간호사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였다.
파독근로자들이 고국에 송금한 봉급은 대한민국 경제부흥의 불씨가 되었고, 이들의 태도는 독일인들에게 긍정적인 한국인상을 형성시키며 한-독 간의 민간사절단 역할을 하였다.
이에 우리는 오늘,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가 간 협약에 의해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근로자들이 국가경제발전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재발견하고 이를 기리고자 본 기념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독일 정부와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감싸준 독일 국민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독일사회의 일원으로, 다른 세상의 이루로, 일부는 평생 그리워했던 고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잊혀져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인구증가와 불안한 산업구조로 실업률이 늘어나면서 경제개발과 함께 외화유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1963년 독일광부로서의 첫 파견이 시작되었다.
서독방문의 공식이유는 ‘라인 강의 기적’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으나, 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 파독근로자로 하여금 외화유입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성장한 독일은 노동력 부족사태에 이른다. 이에 외국인 고용 인력을 늘리면서 한국과도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지원받게 되었다.
500명의 사람을 뽑는데 지원자의 수는 46,000명 이상이 몰렸다. 그중 상당수는 고등교육을 마친 학사도 있었다. 1963년 12월, 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젊은이들의 눈에는 약간의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다른 언어, 다른 환경에 처해 어려움을 격어야 했던 젊은이들은 작은 소책자를 만들어 정보를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
힘든 병동일과 속에 간호여성들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당시 독일신문엔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 등의 기사가 실리곤 했다.
당시 파독 광부의 선발조건은 20세-35세 남성으로 1년 이상 탄광 근무경력이 있는 국회의원 비서 등 고학력자가 많았고 그 외 사업가, 농부, 군 전역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 행을 지원했다.
독일의 지하 1200미터 막장에서 땀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자기 몸만큼 무거운 동발을 쉼 없이 뽑고 또 세워야 했다.
자신의 몸의 두 배만한 외국인들에 비해 허리가 가는 한국인들은 동작은 빨랐지만 힘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사투였다. 많은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운반공, 기계공, 전공, 잡부 등으로 독일의 지하에서 푸른 청춘을 불살랐다.
외국인 노동자 정책은 초청근로자 정책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계약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손님’으로 인식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에 퍼지고 있었다.
파독광부출신들만이 회원이 될 수 있는 (사)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파독간호여성들에 의해 결성된 (사)재독한인 간호협회, 독일로 이주한 한인여성 중 사회문제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모인 재독한국여성모임 등이 있다.
광부들과 간호원들은 독일 국민이 감탄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고 그렇게 번 돈 대부분을 국내 가족에게 송금했다. 1달러의 외환도 소중했던 당시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송금한 돈은 국제수지 개선 및 국민소득 향상, 나아가 한국 경제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